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에드거 후버 (문단 편집) == 행적과 영향력 == 가난한 형편 탓에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의회도서관|미국 국회도서관]]에서 보조 사서로 일하다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뒤 법무부에 들어가 후에 [[FBI]]의 전신이 되는 법무부 산하의 수사국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였던 [[엠마 골드만]]을 국외로 추방시키는 데 공헌한 후버는 그 공으로 1924년 20대 후반 나이에 수사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 법무부 산하 수사국이 그다지 크고 중요한 부서가 아니었던 탓도 있지만 갓 들어선 쿨리지 행정부가 전임 대통령 하딩의 안 좋은 유산을 청산하려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후버의 전임 국장은 온갖 지저분한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 미국은 [[금주법]] 등을 기회로 삼아 각지에서 일어나는 [[마피아]]와 거리 갱들의 [[범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각 카운티나 시, 주정부의 힘만으로는 마피아와 갱들을 잡기가 어렵다."라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이들에 대항할 만한 조직을 만들게 되는데 이리하여 1935년 수사국을 연방수사국으로 확대개편했다. 중앙집권적인 법 체계를 가진 한국으로서는 낯설겠지만 당시만 해도 연방정부에서 범죄자를 잡는 것에 대해서 '''주정부에 대한 권리 침해'''라는 말이 많았다. 이후 후버가 이끄는 FBI는 새로 인력을 보강하여[* 후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기준으로 사람을 뽑았고 수사관들에게는 되도록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도록 하였다.] 신출귀몰한 갱스터 [[존 딜린저]]를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검거, 사살했다. 후버는 딜린저에게 '''[[공공의 적]]'''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요란한 [[언론 플레이]]를 이용해 악당에 맞서 미국을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었으니 후버는 FBI의 첩보 능력을 이용해 유명인이나 유력 정치인의 뒤를 캐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여 치부를 고스란히 기록한 비밀 파일들을 만들어 두었다.[* 후버는 도서관에서 보조 사서로 일했던 경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조직을 운영하면서 각종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후버가 활동한 시기는 공기관들의 기록 관리 시스템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아 기록물들의 소실이 상당했는데, 후버는 일찍이 기록 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 공유해서 기관 업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후버의 이런 기록 관리에 대한 관심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J. 에드가]]》에서도 나타난다.] 혹여 정치권에서 퇴진 요구가 있으면 조용히 정계 인물들 관련 비밀 파일을 빌미로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이 경우는 실제 그 인사가 그런 추문에 휘말린 경우도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혹이 있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후버는 죽을 때까지 거의 50여 년 동안 FBI 국장직에 있을 수 있었지만[* 다만 후버는 새로운 대통령들이 자신의 FBI 국장 지위와 권력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대통령의 정적들 [[비리]]와 [[불륜]] 증거를 주기적으로 넘겨주었다.] [[리처드 닉슨]]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그가 죽지 않았더라도 닉슨의 손에 의해 [[숙청]]당했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FBI는 해외 정보수집까지도 관장할 정도로 권한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후버는 스파이를 색출한다면서 광범위한 도청과 감시를 통해 많은 고급 정보들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FBI가 너무 커졌다."'''라고 판단하여 해외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기관을 창설했으니 그게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다. 이로 인해 해외 정보수집까지 장악해서 명실상부 모든 정보를 틀어쥐려 했던 후버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후버는 계속 국내 정보 수집을 통해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은 후버에게도, 케네디 형제에게도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마피아]]를 소탕하겠다고 선언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때문에 후버가 마피아의 협박을 받았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후버의 권력을 줄이려던 케네디 형제에게 후버가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을 들이대자 케네디 형제도 할말을 잃었다."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케네디가 정실 인사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면서 동생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던 것도, 후버의 상관 자리에 믿을만한 인물을 앉혀 그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처음엔 후버를 내쫓으려다가 "그 인간이 텐트 밖에서 텐트 안으로 오줌을 싸게 하느니 텐트 안에서 텐트 밖으로 오줌을 싸게 하는 것이 낫겠지."라는 말을 남기면서, 후버를 '''종신 FBI 국장'''으로 임명해줬다.[* "내쫓아서 정치인들 비리를 동네방네 폭로하고 다니는 워싱턴의 골칫거리가 되게 할 바에야 그냥 놔둬서 안에서 날뛰게 내버려 두자."라는 의미.] 그리하여 후버는 죽을 때까지 FBI 국장에 앉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저 영감은 100살까지도 국장짓 해먹을 양반"이라고 할 정도. 그러나 닉슨의 예언이 빗나가서 결국 닉슨 1차 재임기인 [[1972년]] 5월 2일 사망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후버는 [[https://socialism.com/fs-article/fbi-spies-on-feminists/|페미니즘 운동에 스파이를 심었고]] 이는 사망 후 5년만에 폭로되었다. 생전의 후버는 마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범죄조직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비호했다. 여기에 죽을 때까지 영구 집권했다는 점[* 물론 이건 당시 주적이던 [[소련]]을 농락하던 능력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등 모든 것이 드러난 지금 시점에서 좋게 말하면 '''[[냉전]]이라는 시기에 딱 맞는 사람''', 나쁘게 말하면 '''반(反) [[인권]]의 상징'''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죽은 후 FBI 국장의 재임 기간 상한이 10년으로 제한되었으며, 당연히 [[인권]] [[활동가|운동가]]들의 대다수는 후버를 '''[[사탄]] 취급할 정도로 매우 싫어한다.'''] 왜 후버가 [[마피아]]를 수사하자는 부하들의 간청을 뿌리쳐가면서까지 그들을 비호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이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대표적으로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마피아/국가/미국|제노비스 패밀리]]가 후버와 그의 부하 클리드 톨슨이 동성 성행위를 하고 있는 사진이나 후버의 여장 사진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설, 후버가 도박 중독이었다는 설, 부하 수사관들이 마피아와 거래하면서 부패하는 걸 원치 않았다는 설, 마피아와 대적했을 때, FBI의 무능이 공공연히 드러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설, 마피아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파제로 봤다는 설, [[프랭크 코스텔로]], [[카를로 감비노]]로 대표되는 당대 정상급 마피아 두목들과 상호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 등 다양하다.[* 훗날 후버가 사망하고 10년이 지나서야 FBI는 마피아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를 개시한다.] 후버가 사찰한 사람들은 [[엘리너 루스벨트]], [[헬렌 켈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오펜하이머]], [[존 스타인벡]], [[마틴 루터 킹]], [[찰리 채플린]][* 공교롭게도 채플린은 후버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등이었다. FBI가 지겹게 감시하자 [[존 스타인벡]]은 [[미국 법무부|법무장관]]에게 '''"저 후버의 똘마니들 좀 처리해달라."'''라고 할 정도였다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경우에는 후버 본인이 [[흑인]]을 안 좋아한 데다가[* 그런데 후버의 조상 중 일부는 흑인 혈통이 흐른다. 꽤 오래 전 조상이긴 하지만 크리스천 후버가 흑인 노예 사이에 얻은 자식들이 후버의 조상이다. (이런 [[흑백혼혈]]의 후손들을 passing이라고 한다.) 같이 살게 된 지 300년이 넘은 탓에 [[미국 백인]]들도 평균적으로 1% 정도의 흑인 혈통이 있다.] [[민권 운동]]을 한 탓에[* 후버는 마틴 루터 킹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이 [[소련]]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 했고 냉전 종식 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 문서들을 통해서 소련과는 관계가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킹 목사는 먼지 하나까지도 샅샅이 훑었다고 할 정도로 엄중하게 감시했다고 한다. 후버가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는 [[공산주의자]], [[흑인]], [[동성애자]]였는데, 이런 사람들은 FBI의 감시를 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후버 본인이 "[[동성애자]]였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으며, 후버를 소재로 한 미디어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등 거의 [[학계의 정설]] 취급을 받고 있다. 부국장이었던 클라이드 톰슨과는 연인 사이였다고 하며, 어떤 증언에 의하면 "후버가 호텔에서 '''중년 여성으로 여장을 하고''' 방에 앉아서 어린 소년들과 [[아동성애자|성관계]]를 했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상술했듯 후버가 [[마피아]]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며 무시한 이유도 실은 후버가 동성애자라는 걸 약점으로 잡혀서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 후버 자신은 이런 소문을 불식하고자 자주 [[여배우]]들과 식사 자리를 공개적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각종 [[음모론]]의 뒤에 그가 있는데, 케네디 형제와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배후에 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알 수 없다. [[소련]] [[KGB]]가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으나 실각은 커녕 도리어 KGB가 당한 경우까지 있어 결국 죽기 전까지 국장으로 남았고, [[러시아]]조차 인정한 '''베스트 오브 대인배'''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